출처: https://www.dmitory.com/issue/413130237

(먼저 들어가기 앞서, 귀족제/귀족정 반대는 관료제가 아니고, 호족과 귀족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동아시아의 장원이 서양의 것과 성질이 다른 것을 밝히겠음 <그치만 대충 설명하기 힘드니까 뭉뚱그려 쓰기!)
동아시아의 신분제가 각 시기나라마다 다르지만 대충 상류층(양반, 귀족)/양민/천민으로 나뉘는 건 다들 알 거임
이미지는 저기에 상인이나 무사가 들어가는 중인을 넣었지만 세 가지 계급이 보편적이라 보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저 상류층인데 이 상류층이 핏줄로 귀함이 나뉜 귀족이 주축일 때가 있고, 과거를 통해 신분 상승한 사대부(조선식으로 양반, 하여간 관료)일 때가 있음
말하자면 전자는 혈연으로 이끈 소수 가문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귀족정 형태고 후자는 과거라는 시험을 통해 등용된 관리들이 나라를 이끄는 관료제라 할 수 있겠음
당연히 관료제, 중앙집권화가 고도화 되고 나라 경영 시스템이 체계적인 후자가 더 서민들의 권익을 보호했으며, 양인도 상류층에 편입될 수 있는 기회가 정당한 시스템 하에 열려 있는 등, 계층적 모순을 어느 정도 타파 시킬 수 있는 역을 하여, 국정 운영에 안정적이었음
당연히 인명 또한 보호를 받았고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오히려 이 관료제 사회에서 오히려 여성의 인권이 떨어지고, 신분제가 철저히 굳어질 수록 여성의 지위가 거의 남성과 동등한 수준까지 올랐다는 거임

중국사에서 귀족제가 가장 공고하였다는 위진남북조~수당 시기
이때 얼마나 귀족 족벌이 강했나면, 당태종 이세민이 천책상장으로 군공도 어마무시하게 세우고 신하들도 거의 복종하여 절대왕권을 누리면서 천가한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를 ‘농성이씨(隴西李氏)(=황제가문)’는 일류가문이 아니다라는 말도 했을 정도임
이때 족벌지에 들어간 귀족들이 서로 간 혼인을 하면서 스스로의 고귀함을 지켜왔고 이세민이 씨족지 편찬하려 하니까 대놓고 농성이씨를 자기보다 아랫사람 취급해서 불같이 화를 내서 다시 황가를 1위로 만들었을 정도
심지어 황제가 저 최상위 귀족 오성칠망(五姓七望)의 여식과 혼인을 맺는 것조차 어려워서
황제가 좀 만만하다? 싶은 경우에는 대놓고 모욕을 주기까지 했음
황제가 오성칠망 여식을 며느리로 맞으려 했는데, 그 부친이 거절하고 같은 오성칠망 출신의 현령과 결혼을 시킨 것임! 황제를 퇴짜놓고 ㄹㅇ 말석 중의 말석인 현령이랑 말임
ㄹㅇ 콧대가 높아서 오성칠망은 황실도 낮게 보고 혼인도 안 하려 했다
이때 사실 무측천 같은 여황제가 등장하고 태평공주 상관완아 황후 무씨 같은 여성 정치인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게 북방 민족의 개방성이 영향을 준 탓도 있지만
사실 이 당시가 땅을 기반으로 한 귀족제, 장원제가 철저히 굳어진 시기여서가 더 큼
실제로 찐 북방족 국가인 돌궐, 토번, 후대의 요, 금, 청 같은 경우에는 당나라만큼 여성이 정치 참여에 활발하지 않았음

사실 당연한 것이 서양의 경우와 비슷하게 생각하면 됨
1.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은 결혼 동맹
2. 일부일처 시스템 하에서 맺을 수 있는 처가는 단 하나. (일부다처가 흔한 이민족 국가에서 여권 저점은 높아도 고점은 의외로 높지 않았던 이유)
3. 이혼이 힘든 사회적 분위기
4. 당시 땅을 기반으로 사병을 대규모로 기르던 풍조
여기에 대해 당대 중국의 토지 제도 자체가 혈연으로 더 큰 가문과 더 큰 가문이 결합하여 1+1=3을 내는 구조, 혈연으로 땅따먹기가 매우 쉬운 구조라 결혼동맹의 당사자인 처의 지위가 높았던 거임
서양이나 동양이나 중요한 것은 ‘아내’의 위치가 사실상 당대 여성의 지위를 좌지우지한다는 것(ㄹㅇ 빻은 말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따라서 정치적 결합일 뿐더러, 더 나아가서 땅이랑 병사 문제가 얽힌 이 시가와 처가는 정치적으로 대등한 세력일 수밖에 없었고.
등 뒤에 엎은 세력이 동등하다는 말은 아내와 남편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거의 대등했다는 거임
따라서 이때 위진남북조, 수당의 여인들은 이전 춘추전국이니 후대의 송명청이니 하는 왕조에 비해 월등하게 자유로웠고
세력이 방대했고 남편에게 맞설 수 있는 수단이 많았음 개가도 자유로웠을 뿐더러 심지어 상류층에서도 수치로 여기지 않았고, 태어난 딸을 정성스럽게 양육함
귀족제 사회 특성상 위의 풍조가 아래로 이어지다보니 양민들 또한 다른 시대에 비해서 권리를 누린 편이었음

헤이안 시대 같은 경우는 좀 다르면서 비슷한게
한중보다 여성의 영향력은 높았는데 제도적 지위는 상당히 애매했다
얘네는 이 시기 귀족 문화가 당대 한중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견고하게 흘러갔는데
후지와라씨라고, 덴노의 외척 가문이 정치를 장악하는 혼맥 정치가 당대 정치를 좌지우지한적이 있음
이게 그 난발하여 거의 딸을 천황에게 시집보내 외할아버지가 나라를 먹는다 수준이 되어버림.
즉 정치 핵심이 군사력보다 누가 황자를 낳느냐에 가까웠다는 거임
당시 헤이안 시대가 한중 귀족정 전성기 때(신라~고려/남북조수당)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는데
저 한중의 귀족들은 혼란스러운 시기 가지고 있던 장원과 사병으로 귀족정의 전성기 문을 연 한편
헤이안 시대에서는 혼맥 정치로 귀족정의 전성기 문을 열었기 때문임
이러한 특성상 외가의 영향력이 강하고, 여성 재산권이 보장되고, 여성이 활동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의 범위가 매우 넓기는 했지만
여성이 동등한 ‘동맹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범위는 궁중/후원에 한정되었고
역할도 출산이나 궁중암투에 더 방점을 두었음
처소혼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부부가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결속되는 경향은 상대적으로 약했기에 공적 영향력은 떨어지는 편이었고
하지만 또 이 외가가 극단적으로 중요한 사회 풍조, 여성이 한중일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풍조 때문에 고점이 제일 높기도 했음
합법적으로 여성 덴노가 여럿 배출되기도 하고
비구니 쇼군 같이 외가 세력을 이끌고 남편 세력 흡수하고 사실상 일본 1짱 먹은 여자도 있고
당나라에서도 여성 황제가 단 한 명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쪽의 경우도 여권이 당대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은 편이었음

드디어 신라!!! 나왔다 귀족정의 끝이자 옥상옥 max…! 신분제의 끝 골품제
드디어 우리나라…. 우리나라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게
사실 우리나라는 신분제가 한중일 중에서도 거의 최상위권으로 견고했고 또 이게 꽤나 오래 풍토가 유지된 편이었음
귀족 대신 무사 계층이 상층부를 차지하여 상류 계층의 종류가 엎치락 뒤치락한 일본과 다르게
한국은 귀족적 혈통 의식과 신분 질서가 엄청 오래 살아남았고
송나라 시기 때부터 평민 심지어 천민에게 거의 관리제 대문을 열어, 귀족이라는 개념이 희석된 중국과 다르게
한국은 아예 농민이 과거를 보는 것 자체가 매우 희소한 일이었고 신분 사이의 순환이 안 되는 편이었다
이런 그 처가 중시/ 혈통 관념이 뿌리 깊다 보니
모친의 신분이 한중일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곳이었음
삼국시대에서는 아예 왕비족들이 존재하였고
고려에서는 더 나아가서 왕실 내 공주들이 왕후가 되었고
조선도 왕비족은 없지만 그에 비견될 정도로 일정한 가문에서 왕비를 돌아가면서 배출하는 면모를 보였음 (당시 명나라에서 황후를 한가에서만 뽑았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삼국시대/후삼국 때 위진남북조 시기처럼 장원/사병을 기반으로 한 여성의 지위가 공고하였고, 귀족들의 지위와 부는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할 정도로 대대로 상속됨
이때 신라에서는 골품제라는 가히 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철저히 차별적인 신분제가 등장하는데.
물론 다른 나라도 신분별로 의식주에서 차등을 두었지만
골품제에서는 귀족들 내부에서도 십여 등급을 나누어, 그 등급 별로 관직 승진 한계, 입을 수 있는 옷, 사는 집 크기 등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규범화 시킨 게 특징
매우 고도하된 귀족제였고 갑등급 귀족과 을등급 귀족, 병등급 귀족 간의 격차가 철저하여 성차별이 신분차별에 격렬하게 뒤지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보다 중앙집권화가 되었고, 관료제가 발달하였음에도
한국에서 여성 지도자가 대거 등장하고, 여성의 권한이 대대로 중국보다 훨씬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삼국시대부터 굳어진 이 귀족 관념은 후삼국 군웅할거 시대 때 난무한 호족의 등장에 힘입어
신분과 신분 사이의 순환이 절대적으로 제한된 형태로 등장하였고
따라서 성차별을 신분차별이 잡아먹은 형태로 여성의 권한이 보호되었음
조선쯤 가면 장원/사병의 경우 거의 의미가 없어지지만 그럼에도 이 거의 천 년 넘은 신분제 관념이 여권에도 영향을 미쳐
균등 상속, 처가살이, 처가의 지위, 외손의 지위 등에서 당대의 한일보다 더욱 더 보장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건 뿌리깊은 한반도의 외가 중시/ 처가 중시 풍습을 타도하려는 성리학의 끊임없는 투쟁(…) 과 임진왜란이라는 사회적 격변 이후 교조화된 분위기 탓에 돌변하여 여권의 지위가 급락하게 됨.

요하자면
한국은 고대부터 뿌리 깊은 견고한 신분제 관념이 성차별을 잡아 먹어, 여성의 지위가 높았고 귀족제 특성 상 처가의 지위도 높았으나, 심지어 조선이라는 관료제 하에서도 무려 이 특성을 유지했으나 > 임진왜란으로 인한 성리학의 교조화로 여권 지위 급락
중국은 위진남북조수당때 땅따먹기/사병 흡수가 매우 중요하게 여긴 지라 여성의 위치가 전후 역사를 통틀어서 정점에 이르르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매우 컸으나 > 이후 관료제가 매우 공고해지고, 신분 간의 경계가 흐릿해져, 신분 간 이동이 유동적이게 되어 귀족제 사회를 벗어남. 토지 결합과 사병 양성이 의미 없이 남자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잡는 과거제 특성상, 아내가 중요하지 않은 내원의 활동으로 한정되게 됨. 결론 여권 지위 급급락. (한국보다 훨씬 낮음)
일본은 덴노의 권력이 살아있던 헤이안 시대에 정점을 찍고 궁중의 정치를 여성이 주도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나> 무사들이 난립하여 실권을 빼앗고, 실제 귀족 문화는 유지했으나 권력은 막부가 뺏어가 관료화 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점차 낮아짐. 그래도 에도시대 전까지는 혼인 동맹이 중요한 때라 여권의 하락이 심하지는 않고, 운신도 자유로운 편이었음
보면 알겠지만 귀족제의 두 가지 핵심이 혈통/사병과 장원인데
전자는 혼인이 반드시 요해졌고 후자는 혼인이 그 세력 유지의 핵심이었음
근데 문제는 또 이 귀족들이 땅 가지고 그 세력 토후 짓하고 사병을 거느려서 난립하는 봉건제 유사무리한 제도가
사실 정치적 안전성이 매우 떨어지는 지라, 정치 제도가 고도화 되면서 해체되는 게 필연적이라는 거임
기록에서도 보면 힘없는 서민의 보호 또한 조선/송명 같은 국가에서 훨씬 더 잘 된 걸 볼 수 있음}
귀족제야 인명경시, 귀족 특권, 부와 식량의 집중이 심한 게 걍 기본 특성인지라
고려는 아예 공민왕 때 가장 먼저 나온 게 전민변정도감(강제로 노비 된 양인을 해방시키기)일 만큼 겸병, 수탈 문제가 매우 심각했는데 조선가면 이건 거의 나라가 뒤집힐 스캔들이었고
위진남북조처럼 석숭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거절당하니 시비를 죽이고, 그 시비를 죽일 때 눈 깜짝 안한 선비를 찬양했다라는 식의 기록은 송명에서는 ㄹㅇ사이코패스 취급 받으면서 매장될 일이었고
하여간 그렇게 아주 고대부터 생성된 신분제라는 악랄한 제도를 타파하면서 천천히 서민의 인권은 상승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 여성의 신분은 급락하는 현상이 벌어짐
서양은 이 근현대로 전환이 혁명으로 급작스럽게 이어진 지라 여권이 선형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임
루소 루크 에밀과 같은 여러 혁명가들의 사상이 토대를 잡으면서, 당대 세계를 인식하던 관념이 흔들렸고 여성 운동에도 영향을 끼침
행정 발전과 서민에 대한 공적인 보호가 여권과 함께 갔다 할 수 있음
정반대로 동아시아 여성사는 시대가 발전할 수록 여성 인권이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는 형태로 발전되어 도리어 행정이 발전되고 서민의 보편적인 권리가 신장될 수록 여성이 배제되는 형태라 할 수 있겠음
사실 이래서 동양은 복지가 서양보다 훨씬 더 잘되었고, 특히 한중은 서양 일본보다 훨씬 더 민중의 삶에 신경 쓰는 편이었고, 삶의 질도 좋았음
그러나 이 시스템에서 여성은 배제되었다 볼수 있음
원톨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 이거야 동아시아가 만약 개방되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해나갔으면 여성인권은 더 떨어졌을까? 성리학이 교조화된 후 문제가 다시 생겨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여 여권이 오를 여지가 있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욱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고 예속관계화 되었을까?
여성사를 보다 보면 여권의 고락을 단순히 성리학 때문, 북방민족 문화 때문 정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귀족제 해체, 혼맥 정치 붕괴, 중앙집권 관료제 강화 같은 정치·사회 구조 변화까지 같이 봐야 설명이 되는 부분이 꽤 많다는 게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음






